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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역사 - 1/2차 대전 중간
Tank History - Inter-War (원문보기)

1. 전차(Tank)
2. 전차의 역사 - 세계 제 1차 대전
3. 전차의 역사 - 1/2차 대전 중간
4. 전차의 역사 - 세계 제 2차 대전

1차대전이 종결된 후, 독일 최고사령부의 폰 루덴도르프 대장은 연합군의 전차가 독일 패배의 주요한 원이이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독일은 전차가 그들 자신의 계획에 포함시킴으로써 주는 가치를 너무 늦게 인식한 것이다. 설혹 당시 매우 곤궁했던 독일의 산업이 전차를 양산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연료가 극단적으로 부족하기도 했다. 독일은 1918년에 총 90대의 전차를 생산하였으나 이 중 75대가 연합군에 노획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 쯤, 전차가 가지는 주요한 역할은 보병들을 근거리에서 지원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미국의 전차는 전쟁기간 중 매우 간단한 전투만, 그것도 매우 흩어진 채로 치루었으며, 전차의 수 자체도 매우 제한되었기에 실제로 전차를 대규모로 전장에 투입하기 위한 전술을 개발할 기회가 사실상 없었다. 그렇지만, 전차가 이루어낸 전과는 다수의 전차를 사용하는 것이 미래의 기갑부대가 가지게 될 중요한 역할이라는 것을 최소한 몇명의 군사 지도자를이 인식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전쟁에서 얻은 경험으로부터 전차의 개발 및 사용과 관련해 미군이 평가한 것 중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다음의 네가지이다. (1) 더 강한 화력과 적은 기계적 고장, 강화된 장갑, 넓어진 작전반경, 향상된 환기시스템 등의 필요성 (2) 다른 종류의 부대들, 특히 보병과의 합동 훈련의 필요성 (3) 진로를 결정하고 유지하기 위한 방법 및 통신수단의 개량 (4) 특히 연료와 탄약에 대한 공급 체계의 개선

1차대전중의 전차가 느리고, 어색하고, 다루기 힘들고, 제어가 어렵고, 기계적 신뢰성도 떨어지기는 했지만, 전투 무기로써의 가치는 분명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1차대전에서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각종 전투부대들은 기갑부대가 독립되어서 독자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전차의 올바른 활용에 대해서 그들 내부적으로도 격렬한 논의를 벌였다. 몇몇 지휘관들이 독립적인 전차부대가 존재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전차가 보병대의 일부이며 보병대를 보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1919년, 1차대전 중 미국에서 생산된 경전차/중전차의 분류에 더해, 세번째 분류인 중(中)전차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 '중간급의' 전차는 6.5톤 경전차와 Mark III 중(重)전차의 장점만을 살려서 이들 모두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겨졌다. 경, 중(中), 중(重) 전차의 분류는 양 대전 중간의 시기에 변화를 겪었는데, 1차대전 중 및 그 직후에는 경전차가 최대 10톤, 영국에서 생산되었던 중(中) 전차가 약 10~25톤, 중(重) 전차는 25톤을 넘는 무게를 가지는 것을 지칭하였다. 2차대전 중에는 전차가 전체적으로 무거워져서 경전차가 20톤을 넘는 경우도 있었고, 중(中)전차는 30톤 전후, 전쟁 말기 만들어졌던 중(重) 전차는 60톤을 넘기도 했다. 양 대전 사이의 시기에 분류에 따른 중량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한계 안에서 다양하게 변화하였다.

1920년의 국가방위법(National Defence Act)으로 인해 전차군단은 보병 휘하에 놓였다. 이 법안에 있는 "이후로 모든 전차대는 보병대의 일부가 된다"는 조항은 바로 그 직후의 상황에서 전차가 가지는 역할에 대해 약간의 의문점을 남겨놓았다. 패튼은 독립적인 전차 군단(Tank Copts)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인 면을 고려해서 전차가 기존의 병과 아래에 놓여야 한다면 기병대(Cavalry) 쪽을 선호했다. 보병과 같이 움직이면 더욱 강력한 화력을 가질 수는 있으나 기병대와 같이 움직이면 기동력을 극대화할 수 있을 것임을 직관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전차가 평화시에는 "써먹지도 않을 기계류만 잔뜩 붙은 연안포대처럼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라고 우려했다.

대다수의 병사들이 전차가 전장에서 보병을 보조하여 참호를 돌파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특수무기라고 있식하고 있을 때, 영국 왕립 전차군단의 장교 상당수는 기계화된 조직이 가질 수 있는 더욱 다양한 역할을 구상하고 있었다. 1918년 5월, 전차전술 교리의 아버지로 널리 알려진 J.F.C. 퓰러 대령(Colonel J.F.C. Fuller)은 독일의 침투전술을 바탕으로 하여 이른바 "플랜 1919"라는 것을 정립했다. 이것은 1919년의 대규모 기갑부대의 공격을 위한 매우 정교한 발상이었다.

왕립 전차군단은 1922년부터 1938년까지 동일한 기본 전차로만 견뎌내야 했다. 영국의 기갑전력 이론가들은 항상 서로 이견을 보였는데, 저명한 무기관련 평론가였던 바실 리델 하트(Basil Liddell Hart)는 기존과 그대로 기계화 보병이 주전력이 되어서 여러 병종이 함께 구성된 부대를 원했지만, 퓰러나 브로드 등의 다른 장교들은 순수한 전차의 역할에 더 관심이 있었다.

기계화에 대한 찬성론자나 반대론자 모두 종종 '전차'라는 용어를 단순히 장갑화되고, 캐터필러를 사용하며, 포탑을 탑재하고 전차포가 달린 전투용 차량으로만 한정해서 사용하지 않고, 장갑화된 차량이나 기계화된 장치 등에 폭넓게 사용했다. '전차'라는 용어의 이러한 용법은, 현대의 여러 사람들이나 역사가들이 당시에 이론을 주장하던 어떠한 사람이 순수한 전차 부대에 대해서만 논했는지, 아니면 기계화된 복합병종으로 이루어진 부대에 대해서, 또는 보병대의 기계화에 대해서 논했는지 특정지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영국의 장갑차량은 이동성 또는 방어력 중 어느 한쪽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만들어지곤 한다. 기갑부대와 왕립 전차군단은 모두 정찰 및 습격을 위한 경장갑의 고속 이동 차량인 경전차 혹은 중(中)전차(cruiser)를 원했다. 실제로, "경전차"라고 불리는 차량은 대개 소형의 장갑화된 보병 수송차량이었다.(이보다 약간 이후에 등장한 미국의 장갑 기병대와 유사하다는 것이 더 분명할 것이다.) 한편, 육군 전차대대가 선호하는 전통적인 보병지원임무를 위해서는 중장갑과 높은 방호력이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이들 두가지 교리 모두 전차의 설계에 있어서 화력이라는 부분을 무시하고 있었다.

독일의 기갑화 지지자 중에서, 하인츠 구데리안 대장(Gen. Heinz Guderian)이 아마도 가장 영향을 크게 끼친 사람일 것이다. 1914년에 기병대의 지원을 위한 무선 전신대에 근무했던 경력은 그가 모든 장갑차량에 무선 장비를 갖추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29년까지 많은 영국의 학생 및 군대는 순수히 기갑부대의 편성에만 신경을 쓴 반면, 구데리안은 단지 전차만 개발하거나 기존의 전통적인 부대의 일부를 기계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가 원한 것은 전차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모든 장비가 완전하게 새로이 기계화된 편제였다.

독일의 전차는 구데리안이 구상한 표준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국의 카덴 로이드(Carden-Loyd) 보병수송차에서 착안하여 만든 Mark I은 20mm 기관포만을 장착한, 진짜 꼬마탱크(tankette)였고, Mark II는 20mm 포를 갖추고 있기는 했으나 장갑의 방호력이 약했다. 이들 두가지 차량은 1940년까지 기갑부대의 태반을 차지했다.

프랑스의 교전교리는 다양한 병종의 연합 부대를 복합적인 다른 모든 병기체제를 사용해 보병의 전진을 도와주는 방법이라고 간주했다. 전차는 "장갑화 보병"의 한 종류로 보고 보병과 아래로 분류하였는데, 이는 최소한 전차에서 장갑의 제약을 없애주는 장점으로는 작용했다.

프랑스 육군이 조심스럽게 기계화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샤를르 드 골(Charles De Gaulle)이 쓴 글에 의해 이러한 개발은 거의 중단된다. 드 골 중령은 1934년에 "전문적인 군대를 향하여(Towards the Processional Army)"라는 책을 저술했는데, 여기서 그는 기갑 연대가 일직선의 형태를 취하여 작전을 펼치고 기계화된 보병대가 뒤를 따르면서 소탕작전을 펼치게 되는 모습을 구상하였다.

1936년, 프랑스는 B-1 비스(B-1 bis) 전차를 포함한, 기갑부대와 관련 장비를 대량 생산하기로 뒤늦게 결정하였다. 1920년대 초 에스틴(Estinne)에 의해서 개발된 B-1 비스 전차는 15년 후까지도 최고의(혹은 유일한) 설계로 만들어진 전차였다.

1920년대와 1930년대 초를 지나면서, 미하일 투카체프스키 원수(Marshal Mikhail Tukhachevsky)가 이끄는 소련군의 장교들은 종래의 보병과 기갑부대, 기계화 편제, 항공대까지를 전장에 투입하는 "심화 전투(Deep Battle)"라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미국 발명가인 월터 크리스티(Walter Christie)로부터 얼마간의 도움을 받아 고안한 소련 정부 최초의 5개년 걔획에 따라 확장된 생산설비를 사용하여 소련은 1934년까지 5천대에 달하는 장갑 차량을 생산하였다. 이러게 풍부한 장비에 힘입어 붉은 군대(Red Army)는 보병지원과 복합군의 기계확 작전에 모두 투입할 수 있는 전차 조직을 만들 수 있었다.

1937년 6월 12일, 스탈린이 그를 위협할만한 가능성을 가진 구세대의 고위계층을 없애기 위한 소련 사회 숙청계획을 실행에 옮김에 따라 소련 정부는 투카체프스키와 그를 따르는 여덟명의 고위 보좌관을 숙청했다. 같은 시기에, 스페인 내란으로부터 얻은 경험에 따라 붉은 군대는 군의 기계화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되었다. 소련의 전차들은 지나치게 약한 장갑을 가지고 있었고, 전차에 탑승한 러시아 승무원들은 스페인군과 교신할 수 없었으며, 전투중에 전차가 그들을 지원하는 포병대 및 보병대와 멀리 떨어지곤 했다.

미국은 장갑화 및 기계화 군의 개발에 아주 앞서나가지는 못했다. 프랑스에서처럼 느린 속도의 1차대전 전차들이 공급되고 있었고 전차대가 보병대 휘하로 분류됨으로 인해서 보병 직접지원 이외의 다른 역할에 대한 개발이 지연되었다. 미국 육군성이 1922년 4월에 발표한 성명서는 전차 개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이 성명서에서 육군성은, 일반적인 의견에 따라 전차의 최우선 목표를 "공격시 소총수가 방해받지 않고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규정지었다. 육군성은 모든 임무에 사용될 수 있도록 경전차와 중(中)전차의 두가지 타입을 고려하였다. 경전차는 트럭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순중량이 5톤 이하로 만들어져야 했다. 중(中)전차는 이러한 제한이 좀 더 엄격하여, 무개화차를 사용한 철도수송이 가능해야 하며, 당시 존재하던 고속도로의 교량을 건널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병대가 부설하는 부교를 건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중량이 15톤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되었다.

15톤 전차의 시험 모델인 M1924가 목업 단계에 도달하기는 했지만, 이 전차 및 육군성 및 보병을 만족시키기 위한 다른 시도들은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나타났다. 육군성 및 보병대가 원하는 사양을 중량 15톤의 차량으로 구현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이다.

1926년, 만족스러운 15톤 전차의 생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될 것이 확실하다고는 해도 참모부는 23톤 전차의 개발 승인을 좀처럼 내 주려 하지 않았다. 보병대 중 강력한 장갑을 가진 장갑 중(中)전차를 원하는 전차병들은 이에 저항을 했으나 분과장은 이를 묵살하고, 트럭으로 운반이 가능하며 보병의 필요성에 가장 부합하는 경전차를 개발하기로 동의하였다. 보병대가 경전차 개발에 대해 몰두하고 있고, 또한 전체적으로 전차개발에 필요한 자금이 제한받고 있던 상황의 결과로써 중형 차량의 개발이 늦추어졌고, 궁극적으로는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中)전차의 심각한 부족으로 이어졌다.

J. 월터 크리스티(J. Walter Christie)는 전차, 엔진, 추진기관에 있어서 놀라운 설계자였다. 그의 설계안이 미육군이 요구하는 사양을 충족시키지는 못했지만, 다른 국가들은 그의 차체에 관한 특허를 사용하였다. 재정상태가 부적절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군수성은 몇몇의 실험적 경/중(中)전차의 개발과 월터 크리스티의 모델 중 하나의 시험을 1929년에 그럭저럭 해냈다. 이 전차들은 대개 육군의 다른 조직이 원하는 표준화에 맞지 못하여 어느것도 받아들여지지는 못했다. 예를 들어서 몇몇 경전차 모델은 수송대의 트럭으로 옮길 수 있는 한계 적재중량은 5톤을 초과하여서 불합격되었고, 몇몇 중전차의 설계안은 공병대에서 설정한 부교 한계중량인 15톤을 초과하여서 불합격되었다. 크리스티는 단순히 군의 요구사양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작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만들 수 있도록 군이 전차개발 자금을 대 주기를 원했다. 이후 패튼은 전차의 형상이나 서스펜션, 출력, 무기 등을 개량하기 위해 월터 크리스티와 매우 긴밀하게 작업하였다.

크리스티 전차는 궤도로 운용될 수도, 대형의 솔리드 타이어(안쪽까지 고무로 꽉 찬 타이어. solid rubber tire)를 사용하는 바퀴를 달아서 운용할 수도 있었다. 평범한 지형에서 운용할 때를 위해서 궤도는 떼어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또한 바퀴마다 독립적인 스프링이 달린 서스펜션을 갖추고 있었다. 1929년, 비록 완전 무장 상태는 아니었지만 크리스티 전차는 바퀴를 사용하여 시속 69마일, 궤도를 사용하여 시속 42마일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것을 비롯하여 다영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고속의 경전차를 원하는 보병대 및 기병대에게 있어서 크리스티 전차는 최고의 답을 제시했으며, 또한 그들은 궤도-바퀴를 바꿔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반면, 군수성은 크리스티 전차의 유용함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기계적인 신뢰도가 떨어지고, 일반적으로 그러한 다목적 장비는 우수한 엔지니어링적 관례에 반한다는 의견을 보였다. 이러한 크리스티 전차의 이점과 단점에 대한 논쟁은 20년 이상 계속되었고, 1983년에는 '전환가능한 구조'가 결국 폐기되었다. 그러나 크리스티의 아이디어는 여러 국가의 전차전술과 조직체계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고, 미육군에도 영향을 끼쳤다.

미국에서, 기갑 부대의 진정한 시초는 공식적으로 발족되기 20년 전, 육군성 장관인 드와이트 F. 데이비스가 육군 내에서 전차 부대를 발달시켜야 한다고 명령했던 1928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 그는 영국에서 영국 실험 기갑부대(British Experimental Armored Force)의 기동을 관전한 후 깊은 인상을 받았다. 실제로 그러한 발상 자체는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기병대와 보병대의 열성적 장교들로 구성된 소규모 그룹이 1차대전 이후 그러한 부대의 이론에 대해서 매우 많은 연구를 진행했다. 장갑, 무기, 엔진, 차량 등에 대한 설계의 지속적인 발달은 점차적으로 기계화의 시대로 접어들게 하였고, 말이 가지는 군사적 가치는 줄어들었다. 기계화와 동력차량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차량산업의 발전과 이에 따른 말 및 노새 사용의 감소를 지목했다. 더욱이, 충분한 유류자원으로 인하여 미국은 이러한 기계들의 연료 요구에 대해 독립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전차 부대를 개발하라는 데이비스 장관의 1928년 명령으로 인하여 1928년 7월 1일부터 메릴랜드 주 캠프 메이드에서 시험적인 기계화 부대가 조직되고 진영을 갖추었다. 보병대(전차 포함), 기병대, 야포 포병대, 항공대, 정비대, 군수품 보급대, 화학전 부대, 의무대 등에서 차출된 소부대들이 복합적인 병력의 팀을 구성했다. 1929년, 실험을 계속 하려는 노력은 예산의 부족과 뒤떨어지는 장비 등으로 인해 무위로 돌아갔으나, 1928년의 실험은 결실을 맺어 육군성 기계화 위원회로 하여금 실험의 결과에 대해 연구하고 기계화 군단의 영구적 확립을 건의하게 하였다.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는 1930년부터 1935년까지 참모진의 일원으로써, 육군의 전체적인 차량화 및 기계화를 원했다. 1931년 말, 모든 군부대 및 시설에서는 "실행이 가능하며, 도움이 된다면" 기계화 및 차량화를 도입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또한 필요하다면 관련 연구와 실험에 대한 진행 역시 허가되었다. 기병대는 "정찰, 역정찰(counterreconnaissance), 측면돌파, 추격 및 이와 유사한 작전 등에서 그 역할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전투차량 개발의 임무를 맡았다. 법적으로 보자면 전차는 보병대 휘하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기병대는 때로 보병대의 새로운 전력인 '전차'와 구별되지 않는, 가벼운 장갑과 무장을 갖춘 전차 등의 전투차량 부대를 갖추었다.

1933년, 맥아더는 "말은 수천년 전에는 높은 기동력을 갖추었을 지 몰라도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라고 하면서 기병대의 완전한 기계화를 이룰 무대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기병대가 수송이라는 의미에서의 말을 보조하거나 대체해야 할, 그렇지 않으면 퇴화된 군 편제의 어정쩡한 형태로 남게 되는 때가 온 것이다. 비록 말이 완전히 퇴물이 된 것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차량은 급속히 보급되고 있었고, 점점 그 자리를 잃어가고 있던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병(騎兵)은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기병대를 구성하던 말이 더 빠른 기계들에 의해서 대체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1938년, 미 육군성은 모든 군부대 및 시설에서 기계화 및 차량화를 도입하라는 1931년의 명령을 수정하였다. 이에 따라 기계화의 발전은 기병대와 보병대의 두가지 병종에 대해서만 완료되었다. 한편, 1938년 말, 기병대 사령관 존 K. 헤어 소장(Maj. Gen. John K. Herr)은 "아직 검증되지 않은 차량이 이미 입증되었고, 신뢰할 수 있는 말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함으로써 우리 스스로의 손실로 오도되어서는 안된다"라고 선언하였다. 그는 말과 기계가 기병대 내에서 공존하는 복합적인 군을 선호했다. 1939년 의회 위원회가 있기 이전까지 그는 말로 이루어진 기병대는 전쟁이라는 엄격한 시련을 통과했지만, 말을 대체하자는 사람들이 지지하는 차량화 전력은 그렇지 못하다는 의견을 고집했다.

사실, 양 대전 사이의 기간에 미국에서는 전차의 생산과 전술에 관해서 많은 이론이 생겨났지만 그 중 실증된 것은 매우 적었다. 생산은 몇몇 수제 시험 모델로 제한되어서 1920년부터 1935년까지 단지 35대에 머물렀다. 1939년의 공식 교전교리에서도 보병대와 함께 움직이는 전차에 대해서 1923년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게 다루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규칙에 따라 전차는 보병의 전진을 돕거나 보병대의 제진(梯陳) 돌격과 같이, 또는 그 앞에 위치하기 위해 사용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1930년대에 미육군은 당시 존재하던 교전교리에 전차와 항공기를 포함시키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지만, 중요한 연구결과를 입증할만한 충분한 변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미육군은 보병중심의 군대로 남아있었다. 1940년 봄, 패튼이 심사관으로 참석하여 조지아와 루이지애나에서 벌어졌던 기동훈련은 채피(Chaffee)가 미국의 기갑부대 교리를 얼마나 많이 발전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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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ggdrasill | 2005/12/19 11:25 | 밀리터리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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